시대에 잡아 먹히다
나라마다 대표하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가 있는데, 한국은 음...[킹덤]이겠고, 스페인은 [종이의 집], 독일은 [다크]겠죠, 영국은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 정도랄까요(어디까지 개인적인 취향으로다가). 미국이야...많습니다. 넷플릭스가 미국에서 시작했으니 할 말이 없네요. 일본은 딱히 생각나는 작품은 없는데 아마도 이 작품 [살색의 감독 무라니시]가 아닐까 싶습니다.
[살색의 감독 무라니시]는 1980년대 일본에 성인영화 붐을 일으킨 무라니시 토오루 감독의 일대기를 바탕으로 그린 시리즈로 2019년 공개된 시즌 1은 야마다 타카유키의, 야마다 타카유키를 위한, 야마다 타카유키에 의한 작품으로 정말 돌아이 캐릭터로 에너지를 가득 채워 이끌어갔던 작품이었습니다. 성인 영화 업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주인공 캐릭터 자체가 워낙 독보적(?)인지라 드라마의 수위가 상당히 높긴 했었는데, 수위보다는 이야기가 흥미로웠던 작품이었습니다. 이 드라마는 1980년대 일본 성인 영화 업계의 룰을 깨버린, 주변과의 타협보다는 자신의 룰대로 본능대로 움직이는 무라니시 감독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주인공을 주목 받게 한 것이 성인 비디오 시장이기는 했지만, 그것을 빼고 보면 이 드라마는 기업 드라마에 가깝기도 했습니다.
시즌 1은 잡초처럼 버티던 무라니시 감독이 무모한 시도를 하다가 미국에서 징역형을 받기도 하지만, 변하는 시대에 따라 직접 새로운 시대를 열겠다는 의지로 이야기는 끝입니다. 그리고 2년 만에 공개된 시즌 2. 시즌 2는 그의 꿈이 실현될 지 궁금했던 사람들에게는 다소 충격적인 이야기로 전개가 됩니다. 시즌 1이 시대를 앞서 나가며 성인 영화 시장을 열어가는 독불장군이지만 개척자로 그를 그렸다면 시즌 2에서는 시대의 변화를 파악하지 못하고 민폐형 독불장군으로 그의 몰락을 그리고 있으니까요.
'시즌 1'이 시대를 앞서 나가며 성인 영화 시장을 열어가는 독불장군이지만 개척자로 그를 그렸다면 '시즌 2'에서는 시대의 변화를 파악하지 못한 민폐형 독불장군으로 그의 몰락을 그리고 있으니까요.
헤이세이 시대로 접어든 1990년의 일본. 여전히 돌아이 처럼 평가받고 무모하리만큼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밀고 나가는 무라니시지만, 그는 뒤를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그와 함께 성인 영화 시장의 걸작 <SM스러운게 좋아>를 찍은 배우 구로키는 무라니시 감독을 위해 사파이어 영상의 간판 얼굴로 활동을 합니다. 다만 그녀의 마음 속에는 여전히 무라니시 감독의 작품에서 배우로 활동하고 싶은 의지가 강하고, 무라니시는 이를 알지 못합니다. 무라니시 감독은 공장처럼 영화를 찍어대고, 사파이어 영상의 사장이자 무라니시를 적극적으로 돕고 있는 가와다 역시 이대로 가면 안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죠. 무라니시의 질주를 막아보려 하다 둘 사이는 깨지고, 무라니시는 다이아몬드 영상을 차리면서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그런 그에게 들어온 것은 바로 위성. 그는 이 위성을 통해 전 세계에 본인의 작품을 뿌리고자 하고 있으며, 이 위성만이 답이라고 생각하고 위성 전송권을 획득하기 위해 무라니시답게 모든 것을 걸게 되죠.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걸었던 위성으로 인해 그의 다이아몬드 영상은 균열이 되기 시작하고, 그는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시즌 2는 시즌 1과 분위기가 상당히 다릅니다. 시즌 2 에피소드 전부가 위태로움을 가지고 있고, 이 위태로움은 곧 캐릭터들에게 고난과 절망을 안겨줍니다. 무라니시 제국이 균열되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한 무라니시는 어떻게든 앞만 보고 달리지만, 그것은 곧 그의 주변 인물들에게 영향을 미치죠. 그 막무가내 돌격이 통쾌했던 시즌 1은 그 막무가내 모든 일을 다 악화시킵니다. 시즌 2는 그러다보니 무라니시가 제도를 무너뜨리는 것에서 통쾌함을 느꼈던 시즌 1의 팬들이라면 무라니시에게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주인공에게 악감정을 품는 기현상이 생기죠. 그렇기 때문에 시즌 1의 무모함이 경쾌했더라면 시즌 2의 무모함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좀 더 비극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이끕니다. 그가 꿈꾸는 미래는 없고, 그 꿈으로 인해 많은 것을 잃게 되죠. 돈도, 사업도, 사랑도, 사람도. 그렇지만 그는 마지막에 가서야 정말 소중한 것을 잃고 깨닫습니다.
시즌 1에 비해 시즌 2는 스토리를 끌고 가는 동력이 약합니다. 주인공인 무라니시의 에너지를 응원하기 힘드니까 더더욱 그렇네요. 이런 무라니시 대신 주변 캐릭터들에게 드마라를 부여하기는 했지만, 결국은 이게 무라니시의 행보에 맞물려 시너지 효과가 나야 하는데 그러지는 못합니다. 시즌 1과 완전히 다르니까요. (무라니시가 워낙 답답하다는 것이 한 몫합니다) 한 사람의 무모함이 주변 사람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다가 그 무모함이 실망과 절망으로 주는 이야기가 [살색의 감독 무라니시] 시즌 1과 2의 이야기입니다. 야마다 타카유키는 그 어려운 캐릭터를 정말 멋지게 소화했고, 그와 함께 하는 배우들도 열연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쿠니무라 준과 릴리 프랭키의 무게감을 좋아해서 두 캐릭터의 이야기도 무척이나 마음에 드네요.
시즌 1과 마찬가지로 성인 영화 산업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수위가 상당히 높고 불필요한 노출 장면들이 꽤 있습니다. 넷플릭스 일본의 대표적인 오리지널 콘텐츠라고는 생각하지만 넷플릭스에 수많은 오리지널 시리즈가 있으니 이 시리즈를 꼭 선택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 누군가 제게 시즌 1과 시즌 2 뭐가 더 좋았어요?라고 묻는다면 시즌 2라고 이야기하고 싶네요. 모두가 앞만 보다가 뒤를 돌아보는 시간을 주어서 그랬나봅니다.